진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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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목정성지

진목정

진목정의 원래 지명은 ‘참나무뎡이’라고 하였다. 뎡이는 골짜기를 나타내는 ‘단이’의 방언이며 참나무는 ‘眞木’의 옛글이니, 이곳은 참나무가 많은 골짜기라는 것을 표현하는 지명이 된다.
참나무 뎡이라고 하는 정겨운 이 지명은 1894년의 갑오개혁 당시에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는 개혁정책이 시행되면서, 진목정이라고 하는 지명으로 정리되었으며 지금까지 이렇게 진목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진목정은 경북 경주시 산내면 내일2리에 속해있는 작은 마을인데, 이 지역은 1906년 이전까지는 산내면이 아닌 경주부 남면로서(南面 路西)에 속한 곳이었다.

남면로서는 단석산에서 백운산, 고헌산, 문복산을 모두 아우르는 산간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1871년에 작성한 경주읍지를 살펴보면 비을지(빌기), 시다화(대현), 소야(소호), 차동(차리), 잉포(인보), 삼정동(전읍) 등의 마을이 나타난다.

경주읍지에 기록된 시다화는 동창천과 범곡천이 합류하는 지역으로 현재의 행정구역은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가 되며, 참나무뎡이는 시다화의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작은 마을들 중 하나로 참나무 골짜기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었다.

진목 공소

참나무뎡이에 교우촌이 자리 잡은 것이 언제부터였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다만 경신박해 이전부터 간월 공소를 중심으로 하여 언양현과 경주부 남면 로서의 산악지대(당시 "울산의 죽영리"라 불리던 지역)에는 신자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은 1860년의 경신박해를 당하여 순교하신 분도 계시고, 재산도 수탈당하는 핍박을 받았다.
최양업 신부님도 경신박해 당시 이 지역에 사목방문을 하였다가 박해를 만나 죽림굴로 피신하여 경신박해의 참혹한 사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최양업 신부님의 뒤를 이어 이 지역에 대한 사목 책임을 맡은 분은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이였다(성 다블뤼 안토니오).

다블뤼주교님이 1862년 10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참나무뎡이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스무날 정도 머무르면서 경주, 언양, 밀양의 산간지방에서 찾아오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고 교리 공부를 시킨 내용이 나온다.
다블뤼주교님은 참나무뎡이로 추정되는 지역에 대하여 새로 세운 교우촌, 다섯채의 가옥이 있는 마을, 지형적 위치의 장점을 가진곳, 간월공소로 추정되는 곳에서 4리외(약 16km) 떨어진 곳, 등의 표현을 하였다.

이 기록에 근거한다면 참나무뎡이 공소와 교우촌은 경신박해 직후에 세워졌다고 볼 수 있고,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는 피난처의 역할과 경상도 남부 산악지대 신자들에 대한 연락처의 중심 구실을 맡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블뤼 주교님은 1864년 봄까지 매년 이곳으로 사목방문을 하였으며, 그 해 가을부터는 이 지역의 사목활동을 리델(Felix Clair Ridel) 신부님에게 인계하였다. 후에 6대 주교가 되는 리델 신부님은 1865년에 이 지역으로 사목방문을 오게 되었다.
그러나 1866년에 병인박해가 발생하면서 사제의 사목방문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883년에 김보록(Achille Paul Robert) 신부님이 방문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김보록(Robert Achille Paul) 신부의 사목방문은 1883년부터 부산본당이 설립되는 1890년까지 매년 이루어졌다.
그 이후에는 대구본당과 부산 본당의 신부님들이 협의에 의해 사목방문이 진행되어 오다가 1897년과 1898년에는 명례성당을 담당한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가 이곳 사목을 전담하기도 했지만 곧 건강이 나빠져 더 이상의 사목방문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에 1899년 10월에 김보록, 김성학, 안세화(플로리앙 드망즈), 에밀타케 이렇게 네 분의 신부가 사목분할을 논의하여 경상도 남동부에 있는 17개의 공소를 부산본당소속으로 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강성삼 신부가 맡았던 진목정공소도 부산본당의 드망즈 신부(후에 대구대목구 초대 주교가 됨)가 담당하게 되었고 진목정 공소는 부산본당에 소속된 공소가 되었다.
진목정 공소는 1926년에 경주성당이 세워지자 경주성당 소속의 공소가 되었다.

진목정에 거주한 주민들은 박씨 가문의 사람들이 선주민으로 나타나는데 그들이 언제부터 정착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1894년 뮈텔 주교가 사목방문을 하였을 당시에 뮈텔주교를 맞이한 박요한 회장이 그 선주민 집안이다.
그리고 김종륜 루카 복자의 방계인 김종운이 병인박해를 피하여 오다가 충청도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서 순교를 하였다. 그의 부인이 남은 가족을 이끌고 진목정에 정착하였는데 그 집안에서 김승연 아오스딩 신부를 배출하였다.
김문학 (알로시오) 가정은 병인박해가 발생하자 경주 양북에서 우중골로 피신하였으며 우중골에서 다시 소태동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898년 경에 진목정으로 옮겨와서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살고 있다.
그 후 1930년 초에 구룡공소에 살던 이상우 가정도 이주하여 왔으며 이 집안에서 이임춘 신부를 배출하였다.

진목정 공소는 경주성당(현 성동 성당) 소속에서 성건성당 소속으로 변경되었으며, 이후에 건천 성당을 거쳐서 현재는 산내성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