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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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목정성지

이양등(李陽登)
베드로

(  ~1868)

이양등 베드로는 울산 죽영리의 회장이었다.
울산 죽영리 회장의 봉직 범위는 경주 남면로서와 언양에 위치한 산간지대의 교우촌들로 대동여지도에 어의현으로 표기된 지역이 그의 담당 구역이었다.
박해시대 회장의 역할은 신부님과의 연락과 사목길 안내를 하며, 전교사업과 예비자들에 대한 교육, 신자들과의 소통과 돌봄의 일을 맡아 하는 것이었다.
성품이 선량한 이양등 베드로는 꿀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죽영리 회장으로서의 직분을 열심히 수행하였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박해를 피하기 위해 안살티(현 울산광역시 상북면 덕현리 청수골)로 피신해온
허인백 야고보와 김종륜 루카를 만나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좀 더 안전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세 가족들은 (현)‘경주시 산내면 내일리(소태) 단석골 범굴’로 피신하였다. 동굴에서의 궁색한 살림에서도 이들은 공동체 정신으로 나눔을 실천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8년 무진년에 경주포교에게 잡혀 경주진영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심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그 후 그는 김종륜 루카, 허인백 야고보와 함께 울산 장대로 이송되어 효수형에 처해졌다.
이양등 베드로는 처형장으로 나아갈 때에 즐거워 용약하여 말하기를 “천당복 마당에 들어간다”고 했으며, 순교 당시에 십자성호를 긋고 예수님과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두 번째로 순교했다.

김종륜(金宗倫)
루카

(1819~1868)

김종륜 루카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충청도 공주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경주이며 족보 이름은 경희이다.
김종륜 루카는 평소에 특히 화목함을 강조하였고, 어느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였으며,
이순이 루갈다의 옥중편지를 비롯한 교회서적들을 직접 필사하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가족들과 함께 ‘경상도 상주 멍에목(현 충청도 보은 멍에목)’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언양 근처인 울산 죽영리'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이양등 베드로와 허인백 야고보를 만나 그들과 합류하여 서로 권면해가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병인양요로 인하여 박해가 더 극열해지자 좀 더 안전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이양등 베드로, 허인백 야고보와 의논하여 경주 단석골 범굴로 가족들을 데리고 피신했다. 그곳에서 근 2년간 동네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혹은 장에 나가 물건을 팔기도 하면서 생활하다가 발각이 되어 경주 포졸에게 체포되었다.
김종륜 루카는 경주진영에서 심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그 후 그는 이양등 베드로와 허인백 야고보와 함께 울산 병영으로 이송되어 효수형에 처해졌는데,
순교 당시에 십자성호를 긋고 예수님과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첫 번째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허인백(許仁伯)
야고보

(1822~1868)

야고보 복자는 1822년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25세 때에 황사극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으며, 그 후로는 매우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여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1860년 경신박해 때에 경포교와 언양 포교에게 체포되어 무수히 매를 맞고 언양 관아로 끌려가서 문초를 받았지만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그리고 언양 옥에서 50여 일 감금되어 있다가 다시 경주 진영으로 이송되었으며, 이곳에서도 문목을 받고, 8개월 동안 옥에 갇혀 지내다가 박해가 중단되는 조치에 힘입어 석방되었다.
석방된 허인백 야고보는 가산을 정리하고 가족들과 함께 ‘언양 대재(간월)’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지켜나갔다. 그러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을 데리고 당시 이양등 베드로가 거주하고 있던 안살티로 옮겨가게 된다. 여기서 이양등 가족과 함께 지내던 중 병인양요로 인하여 더 심해진 박해를 피하여 보은의 멍에목에서 내려온 김종륜 루카 가족들과 이곳에서 합류하게 된다.
이 들 세 가족(15명)은 자꾸만 심해져 가는 박해를 보며 좀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당시 '울산의 죽영리'로 불렸던 여러 골짜기 마을 중 하나인 현재의 경주시 산내면 내일리(소태) 단석골 범굴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범굴에서 근 2년 동안 살면서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장터에 나가 물건을 팔기도 하면서 생활하였다.
힘겨운 피난생활 중 1868년 무진년에 세분 복자들은 경주 포졸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경주 진영으로 이송된 세분 복자들은 혹독한 형벌이 따르는 문목을 세 차례나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며, 형벌로 인하여 다리가 끊어질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어서 허인백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작은 칼을 쓰고 울산으로 이송되는데, 80리 길을 걸어 이틀 만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다시 경상좌병사에게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증거한 뒤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난 다음에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현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동)로 끌려나가 이양등 베드로, 김종륜 루카와 함께 효수형으로 순교했다.
그들은 참수 직전에 마지막 술을 나누어 마셨으며, 허 야고보가 죽이는 차례를 알지 못하여 먼저 괴임목에 엎드렸으나 군사들이 ‘법대로 한다’고 하면서 밀쳐내고 김종륜 루카와 이양등 베드로를 차례로 참수한 후 그를 마지막으로 참수했다. 참수전에 허인백 야고보는 군사들을 돌아보며
“나중에 부활할 육신이니 머리를 날쌔게 베고 또 머리를 분별해 달라”고 하면서 부활신앙을 확고히 나타내었다.
치명하기 전에 자기 손으로 머리털을 젖히고, 웃옷을 벗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예수 마리아를 크게 부르면서 칼을 받아 치명하니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1866년 10월( 양력)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는 2차 병인박해로 이어지면서 전국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색출과 처형이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이 여파로 당시 멍에목에 피신해 있던 김종륜 루카는 먼 길을 걸어 당시 이양등, 허인백이 피해 살고 있던 안살티로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박해가 점점 더 심해지자 이들은 가족들과 함께 더 안전한 곳을 찾아 피신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현 경주시 산내면 내일리(소태) 단석골에 있는 범굴이었다.

영남지방에서는 한티, 부산, 경주에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하였는데,
한티에서는 심문 절차도 없이 즉석에서 죽음을 당하는 대학살이 있었으며, 부산에서는 수영장대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경주에서는 범굴에 피신하여 숨어 살고 있었던 세 분 복자가 경주의 포졸들에게 체포를 당하여 울산 병영의 장대에서 순교를 하였다.

세 분 복자가 범굴에서 경주 포교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갈 때에, 허인백 야고보 복자가 가족들에게 말하시기를
"나는 오늘 가면 영원 이별이다.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 당부하며, “치명하신 바르바라(‘이순이 루갈다’ 순교사로 추정)의 일기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의 딸이 버선 한 벌을 주니 받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본래 세상에 알몸으로 왔으니 알몸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다. 너희는 성교를 착실히 믿고 후세에 천국에서 만나자” 고 말하여 스스로 순교 치명의 화관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며 남은 가족들에게 위주영생의 유훈을 남겼다.

2달 여간 경주진영에서 경주부윤에게 문목을 당할 때에도 세 분의 복자들은 혹형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며 위주치명의 삶을 선택하였다.

세 차례의 형벌에도 배교를 하지 않고 신자임을 고백한 세 분 복자들은 형벌에 으스러진 육신을 끌고 형장이 있는 울산 병영으로 이송되어 갔다.
병영까지 팔십리 되는 길을 걷기 조차 힘든 만신창이의 몸으로 끌려가면서도, 세 분 복자들은 자신들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국으로 가는 꽃길인 듯 여겨서 육신의 고통을 극복하고 순교의 화관을 받아드릴 마음의 준비를 더욱 단단히 하였다.

울산 병영에 도착한 세 분 복자들은 경상좌병사가 배교를 강요하는 마지막 기회의 추열에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당당하게 주님을 증거하였다.

이틀 후에 형장이 차려진 병영의 장대앞에 이르러서 사형수들을 위하여 차려진 차담상을 받게 되었다.
세 분 복자들은 차담상에 차려진 음식들을 형장에 구경나온 걸인들에게 고르게 나눠준 다음 이생의 마지막 술을 한잔씩 나누어 마시며,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봉헌하는 영광의 순교를 서로에게 권면하며 주님의 승리를 다짐하였다.

마지막으로 순교의 칼을 받게 된 허인백 야고보 복자는 칼을 휘두르는 망나니에게 이르기를
“나중에 부활한 육신이기에 머리를 날쌔게 베고 또 머리를 분별해 달라”고 하면서 십자 성호를 그으며 예수 마리아를 외치고 칼을 받아 치명하였으니, 이때가 무진년(1868년) 음력으로 대략 7월 28일경 이었다. (승정원에 장계가 도착한 날이 8월 15일로 울산에서 한양까지의 파발마 도착 소요 기간을 역산한 날)

허인백 야고보 복자의 부인인 박조이(召史 : 양인의 아내나 과부를 일컫는 말. 흔히 성(姓) 밑에 붙여 '소사' 혹은 '조이'로 발음하여 부른다. 경상도 방언으로 '조예', '조애'라고도 함)는 세 분 복자가 체포된 범굴에서부터 복자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하여 경주진영과 울산의 병영까지 따라와서 세 분의 치명순간을 모두 지켜보았다.

박조이는 순교하신 세 복자의 머리를 거두어 병영 앞을 흐르는 동천의 강변에 숨겨놓고, 비통함에 흐느껴 울 겨를도 없이 남은 가족들이 있는 범굴로 돌아왔다.

범굴로 돌아온 박조이는 가족들을 추스르고 나서 참나무뎡이 교우들에게 도움을 받아 동천 강변에 숨겨둔 세 분 복자의 유해를 참나무뎡이로 모셔올 수 있었다.
세 분의 유해는 참나무뎡이 위의 도매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 합장하여 모셨는데 이 곳이 현재의 순교자기념성당 앞에 있는 가묘가 된다.

순교자 묘소

“허야고보의 부인 박조이가 먼 곳에서 보고 있다가 세명의 순교한 머리를 사람들을 피하면서 치마에 싸다가 은밀한 곳에 땅을 파고 묻었다가 수일 후 밤에 시체를 옮겨 머리와 같이 경주군 산내면 진목정 동네 뒤에 장사했다고 말했다.”

(허야고보의 딸 골롬바 증언)

1925년 7월 5일 로마 교황청의 성 베드로 대 성당에서 거행된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79위에 대한 시복식이 거행되면서 국내에서도 순교자 현양에 대한 신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대구대교구에서도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당시 대구에 살고 있었던 허명선 안드레아(허인백 야고보 복자의 손자)는 김병옥 요한(김종륜 루카 복자의 손자)과 함께 진목정(참나무뎡이가 1895년부터 진목정으로 마을 명칭이 변경)에 모셔진 세 분 순교자의 유해를 대구 감천리에 있는 교회 묘지로 이장할 수 있게 해달라고 드망즈 주교에게 청원하였다.

이들의 청원을 수락한 드망즈 주교는 세 분 순교자들의 이장사업에 대한 소임을 남대영 루이 델랑드 신부에게 맡겼다.

세 분 순교자 유해를 이장해야 하는 소임을 받은 남대영 신부는 1932년 5월 26일에서 28일 까지 세 분의 유해를 경주의 진목정에서 대구 감천리의 교회 묘지로 이장을 하였으며, 이 때 세분의 묘지는 감천리 교회 묘지의 하단에 자리잡고 있었다.

1944년에는 서정도 신부가 세 순교자 묘역 앞에 비석을 세웠으며, 1954년에 감천리 묘지의 주보로 성모상이 축성되었다.

세 분의 순교자 유해는 감첨리에 있는 교회묘지의 하단에 합장하여 모셔져 있었는데, 1961년에 김봉삼 가밀로가 세 분 순교자에 대한 행적과 진목정에서 감천리로 이장할 당시의 사항을 정리한 자술서를 작성하면서 대구대교구와 신자들에게 순교자 묘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거룩한 세 분 순교자의 유해를 합장한 채로 묘지 하단에 그대로 두기 보다는 묘역 정상에 있는 성모상 가까이에 모시는 것이 좋겠다는 공감대가 교구내에 형성되어서 신현옥 치릴로 신부가 지도사제가 되어 이효상 아길로 위원장과 김종륜 루카 복자의 후손을 비롯한 43명의 신자단에 의하여 세 분의 순교자 시신을 감천리 묘역 정상의 성모상 앞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1970년 1월 1일에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구대교구민들이 뜻을 모아 세운 순교자현양성당인 대구복자성당이 봉헌되었다.
이에 순교자현양을 드높이기 위하여 병인박해 때 순교하셔서 감천리 묘지에 안장해 둔 세 분 순교자의 유해를 1973년 10월 19일에 대구복자성당으로 이장하여 모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목정성지의 순교자 묘소는 가묘로 남아 있다.

세분의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되었다.